1) 아들러의 성장 과정과 교육 배경
아들러는 1870년 2월 7일 비엔나의 유복한 유태인 가정에서 4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들러는 생의 초기부터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겪은 병약한 아이였다. 골연화증으로 네 살까지 걷지 못했으며 다섯 살 때에는 폐렴에 걸려 죽을지 모른다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질병 경험으로부터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며 이는 나중에 그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질병과 더불어 동생 Rudolf의 죽음은 의사가 되고자 하는 그의 목표를 강화시켰다.
아들러는 어린 시절에 병치레를 많이 했기 때문에 어머니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동생이 태어나면서 어머니의 관심을 빼앗기게 되어 어머니에 대한 실망감으로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지 못한 듯하다. 아버지와는 좋은 관계를 맺었으나 Siegmund라는 형을 질투했기 때문에 청소년기까지 형제간 갈등을 경험했다. 이러한 초기의 가족 경험이 훗날 프로이트와의 갈등적 관계를 유발하는 바탕이 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들러의 유년기 특징은 여러 형제자매 속에서 병약함과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투쟁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아들러는 형제나 또래에게 열등감을 느꼈지만 신체적 한계를 보상하기 위해서 투쟁했으며 점차적으로 많은 한계를 이겨냈다. 아들러는 초등학교 시절에 공부를 잘하지 못해서 담임교사가 아버지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구두 수선공 수련을 받게 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교사의 조언을 일축하고 아들러를 격려했다. 그때부터 아들러는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결심했고 급기야 반에서 1등을 하였으며 교사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했다.
이러한 아들러 자신의 아동기 경험은 개인심리학의 이론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경험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동기는 어린 시절에 최초로 경험한 부적절한 느낌, 즉 열등감을 극복하고 우월성 또는 완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울러 인간은 생물학적 조건과 환경적 제약을 극복하고 자기 삶을 선택하고 창조할 수 있다. 아들러는 신체적 질병에 시달리면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나중에 의사로 활동하면서 신체 결함이 개인의 성격과 자기 상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도 했다. 아들러 자신은 타고난 신체적 한계와 운명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창조적인 삶을 실현한 인간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아들러는 비엔나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으며 1895년에 의사 자격증을 획득하여 처음에는 안과의사로 개업했으나 나중에 일반의로 바꾸었다. 결국에는 신경학과 정신의학을 전공하였으며 아동의 불치병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아들러는 개인의 치료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서 아동 양육, 학교 개혁, 갈등을 야기하는 편견 등과 관련된 문제를 자주 거론했다. 그는 고난과 역경에 처한 일반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이해하기 쉬운 평범한 언어로 많은 강연을 하고 글을 썼다. 그의 저서인 '인간 이해'는 미국에서 수십만 권이 팔리기도 했다. 아들러는 제 1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하고 돌아온 후 비엔나의 32개의 공립학교에 아동 클리닉을 개설하여 교사, 사회복지사, 의사를 교육시켰다. 또한 많은 대중 앞에서 아동을 지도하는 생생한 시범을 통해서 부모를 교육시키는 방법을 개척했다.
아들러는 1897년에 사회주의자 모임에서 만난 러시아 유학생과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었다. 그의 아내는 결혼 후에도 사회주의 정당에서 계속 활동하였으며 아들러 부부는 당시 비엔나에 거주하던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인 Trotsky 부부와도 자주 만남을 가졌다. 사회주의자인 아내의 영향으로 그는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권리를 옹호했을 뿐만 아니라 평등하고 민주적인 인간관계를 강조했다.
1902년부터 1911년까지 아들러는 프로이트와 교류하면서 정신분석 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견해 차이로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난 후 독자적인 이론체계인 개인심리학을 발전시켰다. 아들러는 많은 일을 하면서도 음악을 즐기고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들을 소중하게 여겼다. 192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 강연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펼쳤다.
1930년대에 독일의 나치 세력이 오스트리아에서도 점차 강해지자 아들러는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하였다. 1937년 5월 28일 아들러는 스코틀랜드 애버딘의 한 대학에서 강연을 앞두고 산책을 하던 중에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는 저서로 '신경증적 성격', '개인심리학의 실제와 이론', '인간 이해'를 남겼다.
2) 개인심리학의 발전 과정
1) 프로이트와의 만남
1902년에 아들러는 프로이트로부터 '비엔나 정신분석학회'의 모태가 된 수요일 저녁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서로 알게 된 경위는 분명치 않으나 아들러는 프로이트의 초대를 받은 초창기 네 명의 의사 중 한 명이었다. 1907년에 아들러는 그의 유명한 논문인 '기관 열등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여 프로이트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는 '비엔나 정신분석학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1910년에는 이 학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러는 인간의 근본적 동기에 대해서 프로이트와 견해가 달랐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성적 욕구를 중시한 반면, 아들러는 사회적 요인들을 강조했다. 급기야 프로이트는 아들러의 주장을 공허한 것이라고 비난했으며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 차이를 경험하게 되면서 아들러는 마침내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모색하게 되었다.
(2) 독자적인 이론체계의 모색
아들러는 1911년에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비엔나 정신분석학회'를 떠나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자유정신분석학회'를 설립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이 학회는 나중에 창설된 '개인심리학회'의 근간이 되었다.
1912년 아들러는 그의 두 번째 저서인 '신경증적 성격'을 발간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책에서 그는 개인의 행동을 생물학적, 외적, 객관적 원인으로 설명하기보다 심리적, 내적, 주관적 원인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인간의 근본적인 동기를 성적 추동이나 리비도가 아닌 권력 추구 또는 완전성의 추구로 대체하였다. 아들러는 개인심리학의 목표를 자신의 개념으로 인간 전체를 설명하고자 했던 프로이트와 달리 고유한 개인을 이해하는 것으로 삼았다.
(3) 사회적 참여의 강조
아들러는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군의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이러한 전쟁 경험은 인간 본성에 관한 그의 생각을 형성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들러는 병사들 사이의 연대감을 관찰하며 '공동체 의식'이 인간의 기본적 동기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인간은 사회적 참여를 통해 인생의 의미와 자기 가치감을 추구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사회적 참여를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개인심리학의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비엔나는 고아들로 가득 찬 혼란의 도가니였다. 이때부터 아들러의 사회적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비엔나의 여러 학교에 상담소를 개설하여 운영하면서 교사와 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공개적인 토론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아들러는 교사나 부모와 함께 문제 아동에 대해서 자유롭게 토론하며 의견을 교환했다. 그런 다음 아들러는 아동과 직접 면담을 하고 나서 최종적으로 교사, 부모 또는 아동에게 문제 해결을 위한 조언을 제시했다. 이것은 심리치료의 공개토론 모델로 알려져 있으며 공동체 정신 건강 프로그램을 발달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아들러는 심리치료 활동에 소수의 전문가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공개토론 모델은 이러한 그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4) 개인심리학의 보급과 사회적 활동
1920년대부터 아들러는 강연 활동을 통해서 유럽과 미국에 개인심리학을 보급하며 심리치료와 예방적 활동을 강조했다. 또한 여러 곳에 아동 지도 클리닉을 개설했으며 아동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활발한 사회적 활동을 펼쳤다. 성인 환자의 경우 그의 치료는 환자가 나타내는 증상에 숨겨져 있는 목적을 발견하고 실천하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저명한 심리치료자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1927년에 발간한 '개인심리학의 실제와 이론'과 '인간 이해'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저술과 강연을 통해서 열등감 콤플렉스, 출생 순서, 공동체 의식과 같은 개인심리학의 주요한 개념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들러가 사망한 후에 개인심리학을 발전시킨 주요한 인물은 Rudolf Dreikurs이다. 그는 비엔나에서 아들러의 가르침을 받고 함께 활동했던 정신의학자이자 교육자로서 개인심리학이 미국에서 아동교육에 활용되도록 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에 따르면 아동의 문제행동은 사회적 집단에 대한 소속감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네 가지의 잘못된 목표, 즉 부적절한 관심, 권력, 복수, 회피에 의한 것이다. 최선의 치료 방법은 처벌이나 보상에 의하기보다 아동에게 협력적인 행동을 가르쳐서 가정이나 학교에서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시카고에 아동보호센터를 설립하고 공개토론 모델에 따른 가족치료를 실시하였으며 민주적인 가족관계를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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